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또한 법정 스님이 거처하시던 장소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 길상사는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 있습니다. 길상사 유래에 관한 글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냥 보통 사찰로 알고 찾아 가는 곳이지만 원래 길상사는 절터가 아니라 서울에서 아주 유명한 요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정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습니다.
길상사 유래
길상사가 창건 되기 이전에 우리는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의 삶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녀는 너무나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팔려가다시피 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결혼한 남편은 일찍 사별하게 되고 젊은 나이에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생 김영한, 길상화
김영한의 기명은 진향(眞香)이라 하였으며 그녀는 성북동 기슭에 서울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요정은 우리나라에서 사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저녁이면 돈 많은 사람들과 힘 있는 권력자들이 밥을 먹으면서 으쌰으쌰 하면서 단합도 하고 모종의 계획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요정은 밤이면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막대한 부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김영한은 요정을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술과 웃음을 파는 기생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는 여전했고 그녀는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한탄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못내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마음에 걸렸는지 늙어 가면서 김영한은 어떻게 남은 생을 살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이때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법정 스님과 길상사 창건
1987년 그녀는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고 사찰을 세워 달라며 간청합니다. 이러한 부탁에 법정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우게 됩니다. 한편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그녀는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게 됩니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아주 큰 액수의 요정터가 사찰로 바뀌는데는 우여곡절이 많고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이 이렇게 엄청난 금액의 시주를 받은 것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이것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라 별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세간의 관심이 그만큼 컸던 것을 어찌보면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 1999년에 김영한이 죽자 화장하여 절터에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는 있습니다. 한편 2010년에는 법정도 여기서 입적을 합니다. 김영한이 죽고 1년 뒤에 법정 스님도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곳 길상사 극락전에는 김영한의 영정이 있으며, 진영각에는 법정의 영정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한 사찰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라 전해집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이 이 출가한 사찰과 같은 이름을 사진 사찰에서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라 할 것입니다.
꽃무릇으로 유명한 사찰 길상사
길상사는 그 유래도 나름대로 사연이 깊은 곳이지만 우리들에게는 꽃무릇으로 아주 유명한 사찰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맘때 쯤 9월 중순이 되면 길상사는 꽃무릇이 많이 피어납니다. 서울에서 고즈넉하면서도 힐링의 시간을 찾고 싶다면 지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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